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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정비결과 사주명리학의 관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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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정비결과 사주명리학의 관계

베지멀 2021. 3. 12. 09:00

"시작이 좋아야 끝이 좋다."는 속담처럼 한국 사람은 처음 시작을 특히 중요시한다. 그러므로 1년의 계획을 새롭게 세우는 새해 첫날인 설날은 다른 날에 비해 매우 소중하게 여겨지고 있다. 그래서 설날에는 늘 간절한 바람이 많이 따랐으며, 이로 인해 설날에는 점복, 기복과 관련되는 풍속이 많이 있어 왔다. 예를 들면 설날 새벽 거리에 나가 돌아다니다가 처음 듣는 소리로써 1년간의 운수를 점치는 청참이 있었으며, 다양한 방법으로 괘를 만들고 이로써 길흉을 점치는 윷점, 사점, 오행점, 토정비결 등이 있어 왔다. 지금은 정초에 오행점이나 윷점을 보는 사람이 거의 없으나, 토정비결은 아직까지도 정초면 으레 한 번쯤은 보게 마련인 세시풍속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들 점복이 한국의 정초 세시풍속으로 자리 잡게 된 기원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1800년경 유득공(1749-1807)이 지은 경도잡지는 윷점만 자세히 소개하고 있으며, 1835년 유만공(1793-1869)이 지은 세시 풍요에도 윷점에 관한 기록만 나온다. 1849년경 홍석모(1781-1857)가 지은 동국세시기에서 비로소 오행점이 등장하며 윷점과 오행점을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 중기 토정 이지함(1517-1578)이 저술한 것으로 통상 알려져 있는 토정비결에 관한 기록은 경도잡지, 세시 풍요, 동국세시기 등에서 보이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조선 후기까지의 다른 문헌들에서도 토정비결이 등장하는 기록을 좀처럼 찾을 수가 없다. 미국 역사학자 겸 선교사인 헐버트[Homer B. Hulbert]가 1906년 저술한 대한제국멸망사(The Passing Korea)에도 당시 조선에서 유행하던 다양한 점복들이 망라되어 있는데, 윷점과 오행점은 등장하나 토정비결에 관한 내용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현재까지 토정비결이란 명칭이 처음으로 나타나는 문헌은 황성신문, 1899년 12월 19일자 논설로서, 정감록과 관련해 언급되는데, 논설에 등장하는 토정비결이 지금의 토정비결처럼 개인의 한 해 신수를 봐주는 책인지, 아니면 이름만 같고 내용은 다른 비결서를 의미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출처:픽사베이>

토정비결이란 명칭이 황성신문 1907년 5월 8일자 논설과 대한매일신보 1908년 10월 l일자 논설에도 등장한다. 이 기록에서도 토정비결이 지금처럼 개인 신수를 풀어 보려는 용도로서의 토정비결이 아니라 정감록처럼 국가 운수를 예언하려는 용도로서의 또 다른 토정비결이 19세기 초에서 20세기 말에 민간에서 널리 유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토정비결을 손에 들고 십승지를 찾아 나섰다는 표현으로 봐서 그 토정비결은 풍수도참서 역할을 했다고 추정된다. 구한말 신문 기사들에 등장하는 토정비결은 개인 신수를 보려는 지금의 토정비결이 아니라, 조선 왕조의 몰락을 예고하는 동시에 새로운 왕조의 등장을 예언하며 18세기 이후 줄곧 민간에 유포되며 한국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온 정감록과 비슷한 종류의 국가 운수에 관한 풍수도참 비결인 토형가장결이나 이토정비결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토정가장결은 명칭상으로는 이지함이 그 후손의 안녕을 위해 가문에서 간직하도록 하며 전해준 비결이란 뜻이다. 하지만 19세기 중후반쯤 다른 술수가가 자신의 저술을 이지함의 명성에 가탁한 것이다. 이토정비결도 마찬가지이다. 당시 조선에는 동국역대기수본궁음양결, 삼한산림비기, 도선비결, 정북창비결, 남사고비결, 서산대사비결, 두사총비결, 옥룡자기, 경주이씨가장결, 서계이선생가장결 등 다른 많은 비결이 공공연히 민간에 유포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정감록과 함께 토정비결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는 사실은 토정의 명칭에 가탁한 비결이 그 당시 사회적으로 보다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토정가장결은 정감록의 「감결」을 비롯한 다른 도참 예언들이 주로 풍수지리에 의해 국운을 점친 것과는 달리 주로 천문을 갖고서 예언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개인의 한 해 신수를 풀어 보는 용도로서 지금의 토정비결은 1910년대 무렵부터 보급되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민간에는 '토정비결'이란 통칭으로 국운에 관한 풍수도참 비결인 토정가장결, 이토정비결이 먼저 유포되고 있었다. 이즈음 어느 술수가가 '당년 선수 보는 법'에 관한 비결을 지어 유포하면서 이지함과 기존 토정비결의 명성에 가탁한 것이 지금 전해져 오는 토정비결이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19l0~1920년대에 발행된 점술서와 가정백과서인 윳과뎜책(1918), 가정백과요람(1918), 백방길흉자해(1923) 등에 "당년신수길흉보는법[토정비결]"이라 해서 '토정비결'이 '당년신수길흉 보는 법'과 함께 표기되고 있다는 사실은 당시에는 지금의 토정비결이 개인의 그해 신수를 보는 책으로서 아직 확실하게 인식되지 않고 있었음을 반증한다. 그러므로 당시 문헌자료와 여러 정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해볼 때 지금 토정비결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익명의 술수가에 의해 지어져 1910년대 무렵부터 민간에 유포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시풍속의 하나로 정초 점복풍속은 문헌상 기록으로는 윷점이 가장 먼저 등장하고 이어서 오행점-토정비결의 순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런 순서로 정초 점복풍속이 등장했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그리고 지금의 토정비결처럼 개인 신수를 봐주는 책이 아니라 이름만 비슷하고 내용은 전혀 다른, 국가 운수를 예언하는 풍수도참 비결로서 토정가장결ㆍ이토정비결이 별도로 존재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한규진, 2017, 韓國傳統의 四柱 分析에 대한 硏究, 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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