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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사회, 문화적 사상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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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사회, 문화적 사상

베지멀 2021. 3. 2. 13:35

고려는 A.D. 918년 왕건에 의해 건국되었고 34대 공양왕까지 475년간 존속했다. 신라 말에 송악[개성]의 토호였던 왕건은 태봉의 왕인 궁예의 부하로 있다가 918년 궁예를 추방하고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라고 하여 고려를 건국하였다. 개경(현 황해도 개성시)을 수도로 삼았으며 936년 후삼국시대를 형성하고 있던 한반도를 하나의 국가로 통일하였다. 11세기에는 거란족의 침입을 받았으나 명장 강감찬의 귀주대첩[1019년]으로 이를 물리쳤고 대각국사 의천을 통해 불교가 본격적으로 유입되어 불교를 숭상하는 국가가 되었으며 불교의 가장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12세기에 들어 권력투쟁과 내분이 격화되어 무신정변이 일어나게 되었고 왕권이 약화되면서 병권을 가진 무신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13세기에는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의 침입을 받아 전 국토가 피폐화되었고 국력이 쇠퇴하기 시작했다. 31대 공민왕이 즉위하여 왕권을 다시 세우고 국력을 강화시키고자 했지만 그의 정책이 실패로 끝나게 되자, 권력의 중심인 왕권이 무너지고 민심이 급격하게 악화되어 갔다. 이에 무신이었던 이성계와 그의 책사였던 정도전 등이 주도하는 정치세력에 의해 1392년에 멸망하게 되었다.
한편 고려시대에는 성이 보편화되어 출신지를 본관으로 정하고, 본관을 세력 평가의 표준으로 삼기도 하였다. 당률을 모방한 71조의 법률과 보조 법률이 있었으나 일상생활과 관계되는 관습법을 중심으로 자치 질서를 인정하였다. 풍속은 부처에게 제사 지내는 연등회와 토속신앙과 불교가 융합된 팔관회가 성행하였으며, 명절은 설날ㆍ대보름ㆍ삼짇날(상사:3월3일)ㆍ석존제ㆍ단오절(5월5일)ㆍ유두(6월15일)ㆍ백중(7월15일)ㆍ중추절(가위:8월15일)ㆍ중양절(9월9일)ㆍ상달(10월15일)ㆍ동지 등이 연중행사로 발전하였다. 오락으로는 공치기ㆍ씨름ㆍ제기ㆍ석전ㆍ바둑ㆍ장기ㆍ윷ㆍ연ㆍ광대놀이ㆍ꼭두각시놀이 등이 있었다. 의복 관계는 4대 광종 때 공복 제도를 마련하였으나 시대에 따라 달랐다. 평민은 대개 흰옷을 입었고, 여자들은 홍색ㆍ황색의 옷도 입었다. 남자는 상투ㆍ두건을 썼고, 부인은 머리에 쪽을 쪘으며, 귀부인은 외출 때 너울을 썼다. 처녀는 붉은 댕기, 총각은 검은 댕기를 달았고, 귀족은 가죽신, 서민은 짚신을 신었다. 죄인은 관이나 두건을 쓰지 못하였다. 장례풍속은 불교의 성행으로 화장하는 풍습이 퍼졌고, 부모상은 100일 동안 복상하였으며, 고려 말에 주문공가례가 수입된 뒤에 3년 동안 복상하는 풍습이 시작되었다.

고려는 태조 때부터 교육기관으로 개경학ㆍ서경학을 두었으며 1127년(인종 5년) 지방교육기관으로 향학이 설치되어 교육기관이 완비되었다. 잡학 이외의 기술교육은 그 특수성에 따라 사천대(천문ㆍ역법ㆍ지리ㆍ측후)ㆍ태사국(음양ㆍ술수)ㆍ태의감(의학)ㆍ통문관(외국어)에서 담당하였고, 고려의 4대 광종은 유학을 중심으로 한 과거제도 실시로 새로운 지식계급이 성립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였으며, 6대 성종은 국자감ㆍ비서원ㆍ수서원을 설치하여 유교정치의 실천력을 담당할 수 있는 지식계급을 형성하였다. 특히 성종 때 최승로ㆍ김심언의 활약으로 유교의 정치사상체계를 성립시켰다. 문종 때 최충의 9재 학당을 비롯한 12도의 사학이 출현하여 경서ㆍ사적ㆍ한문학이 크게 발달하였고, 이후 15대 숙종과 예종·인종 등의 관학 진흥책으로 최약ㆍ홍관ㆍ박승중ㆍ김인존ㆍ김부식ㆍ정지상ㆍ최윤의 등이 활약하여 유학이 크게 발전하였다. 성리학은 고려 말 문화변동의 원동력이 되었는데 1289년[충렬왕 15년] 안향이 연경에 갔다가 주자전서를 보고 이것을 유교의 정통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충선왕을 받들었던 백이정이 성리학을 연구하여 이제현ㆍ박충좌에게 전하였으며 고려 말기에는 이색ㆍ정몽주ㆍ이숭인ㆍ정도전ㆍ권근ㆍ길재 등 뛰어난 성리학자가 배출되었는데, 특히 정몽주의 노력으로 철학적 이해가 깊어지게 되었다.

<출처:픽사베이>

무신의 난 이후 한문학 경향은 고려 초기 향가문학이 차츰 사라지면서 패관 문학이 대두되어 최씨 무신 집권 하에서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최자의 보한집)은 무신의 난이 일어나기 전 천태종의 정치 참여를 비난하였고, 무신의 난이 일어난 원인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하였다. 그리고 성리학자들의 많은 문집이 나왔는데 전기의 시ㆍ문과는 달리 정치ㆍ사회 등에 관한 논설이 중심이었다. 고려는 태조 이래 불교를 국교로 숭상함으로써 정치사회의 지도이념이 되었다. 불교의 성격은 호국적ㆍ현세구복적ㆍ귀족적 불교로 보호 육성되었다. 따라서 역대 군왕들은 국가의 대업이나 안태를 위하여 대사찰의 건립, 연등회 행사, 대장경 조판 등 국가적 불교 사업을 추진하였다. 고려 초기 불교의 종파는 5교(오교:교종)와 9산(구산:선종)이 양립, 존재하면서 대립 침체된 상태에 있었다. 당시의 고승으로는 균여대사ㆍ혜거ㆍ탄문ㆍ체관ㆍ의통이 있고 그들의 활약이 컸다. 이때 제관은 오월에 건너가 천태사교의를 저술하여 천태종의 기본교리를 정리하였고, 의통은 오월에 건너가 중국 천태종의 13대 교조가 되어 교세를 떨쳤다.

문종의 아들인 의천은 송나라에서 화엄교리와 천태교리를 배우고 돌아와 교·선종의 대립으로 침체된 불교를 통합 발전시킬 의도에서 교선일치를 주장하고, 숙종 때 천태종을 창설하여 교관겸수를 주장하였다. 천태종은 무신의 난 이전까지 왕실과 귀족의 보호로 육성되었으나, 그 후 교단 자체 내의 변동으로 보조국사 지눌은 조계종을 개창하여 고려의 불교는 양종으로 분리되었다. 조계종은 인간의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을 깨닫는 것이며, 좌선을 주로 하여 마음에 경전을 깨닫도록 하는 돈오점수의 수도방법으로 수행을 강조하였다. 조계종이 교리상 발전을 하자 최씨 정권은 왕족 문신들과 연결, 현실참여적인 천태종 세력을 억압하기 위하여 정책적으로 조계종을 후원하여 조계종을 무신정권의 사상적 근거로 삼았다. 참고문헌 : 한규진, 2017, 韓國傳統의 四柱 分析에 대한 硏究, 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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