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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허증명서와 자평명리학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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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허증명서와 자평명리학

베지멀 2021. 3. 1. 19:17

‘이허중명서’의 진위에 대한 논란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허중명서’는 청대에 발간한 ‘사고전서’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 현재까지 전해져 오고 있으며 사고전서는 명대의 ‘영락대전’에서 발췌해 낸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전해져 오는 ‘이허중명서’는 원래의 내용이 아니다. 왜냐하면 ‘영락대전’은 완성 당시 사본으로 정본과 부본을 1부씩 만들었는데, 정본은 명조가 멸망할 때 소실되었으며, 부본 1부는 청나라에 전해져 ‘사고전서’를 편찬할 때 이용되기도 하였으나, 1860년 전쟁으로 많이 산실 되었고, 특히 의화단 사건 때 연합군의 약탈로 거의 소실되거나 산실 되었다. 이러한 논란 속에 여가석이 ‘사고제요변증’을 통하여 ‘사고전서’의 ‘이허중명서’는 허위임을 밝히고 일일이 그 근거를 제시했다. 또한 ‘영락대전’은 명대 초의 서적이어서 이허중이 집필했다고 보기에는 다소 늦은 감도 있지만 송대의 저작인 ‘오행정기’가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어 있어 다행스럽다. ‘오행정기’에는 이허중에 대한 많은 자료들이 있다. ‘오행정기’는 총 34권으로 남송의 료중에 의하여 저술되었으며 당시 저명한 학자 주필대와 동시대 인물이다. 그 내용은 당시 유행하던 52가지 술수서를 총결하여 지은 서적이며 사주산명과 관련되는 내용들이다. 이 52가지 술수서 중에 ‘귀곡자유문’, ‘귀곡자요결’, ‘귀곡자명격’, ‘이허중명서’, ‘오행요론’(이허중), ‘직도가’(이허중)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52가지 외에도 미상의 작가들과 전문 서적들의 자료들을 통틀어서 '광록'이라는 이름으로 인용하고 있다. ‘오행정기’가 인용한 서적 중에서 이허중 저(著)라고 밝힌 것은 ‘이허중명서’, ‘오행요론’, ‘직도가’ 3권이며, ‘귀곡자유문’은 이허중이 모은 것이라 하고 있다.

여가석은 ‘당서’중의 ‘예문지’에서 이허중 이론의 '방대오묘'는 그의 저작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하며, 한유의 묘지명에 저서의 기록이 없다 하여 이허중이 저작을 지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으며, 한유가 쓴 묘지명에서 "이허중이 년ㆍ월ㆍ일로만 사람의 명을 예측했다고."하고 '시'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 것에 대하여 ‘사고제요’를 작성한 기윤(紀昀)의 말을 예로 들었다. 여기서 기윤(紀昀)는 아주 명확하게 그가 ‘사고전서제요’를 편찬할 때 당조의 삼주만 있었지 사주가 없었다고 한 것은 이허중의 묘지명 중 '소직일진'네 글자를 '년 월 일'로 읽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후에 '소직일진'이 곧 '時(시)'를 말한 것임을 발견하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이로 볼 때 당대의 이허중은 이미 命(명)을 논할 때 사주를 사용했음이 확연히 드러난다.

<출처:픽사베이>

‘이허중명서’ 권상은 ‘오행정기’를 그대로 베껴 쓴 것이다. 또한 뒤에 이어지는 내용들은 송대 명서의 내용들이며 ‘이허중명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허중명서’의 중/하권 모두 당송 시기의 명리 서적인 ‘귀곡자유문’에서 나온 것이며 ‘이허중명서’에서 귀곡자 저, 이허중 주로 되어 있는 것은 '귀곡자 저'는 훗날 사람들의 위탁이고, 주문이 확실히 이허중 본인이 지은 것 인지는 알 수가 없다.

여가석의 논술을 종합해보면 ‘사고전서’중의 ‘이허중명서’는 아주 복잡한 문헌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이 서적의 상권은 송대 ‘오행정기’권 14중 유관내용을 베껴온 것이고, 그중 아주 적은 단락의 내용을 제외하고는 ‘이허중명서’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이 서적의 중권과 하권은 사실상 ‘귀곡자유문’이며, 사고관신들이 ‘이허중명서’라 잘못 인식하여 영락대전을 보고 집필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고전서의 이허중명서는 사실상 송대 도서목록에 기재되어 있는 이허중명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이허중명서의 진실한 모습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현존하는 송대의 녹명서로부터 출발해야 알 수 있다. 이허중이나 낙록자, 귀곡자의 저서에 관한 논란이 있음은 분명 하나 이러한 서적들이 명리학의 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명리학이 태동하기까지는 고대인들의 천명 관념에서부터 시작하여 시대적 변천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운명에 대하여 예측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으로 발전되어 왔으며 현재까지 우리는 '자평명리학'으로 사람의 미래를 예측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 한규진, 2017, 韓國傳統의 四柱 分析에 대한 硏究, 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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