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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 한나라, 수나라 시대의 사주명리학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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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 한나라, 수나라 시대의 사주명리학

베지멀 2021. 3. 1. 09:06

비록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진(秦) 나라이지만, 그 이전 춘추전국시대 백성들은 "이제 어느 나라라도 좋으니 통일을 이루자"라고 하는 열망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진나라가 통일을 하게 되는데, 통일국가를 형성하고 보니 전쟁도 일어나지 않고 죽는 일도 줄어들고, 긴장도 좀 덜되고, 때문에 적절한 규모의 사회조직과 안정된 사회가 이루어지게 된다. 진나라가 멸망한 후 한나라 때에 동중서라고 하는 대재상이 나온다. 한나라는 초한대전을 거쳐 중국을 다시 한번 통일했다. 그러나 진나라의 경험이 있었기에, 그 통일을 오래 유지하려고 많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나라의 강제적인 군현제가 중앙행정의 과중함과 지방 세력의 반발을 가져왔다고 보고, 옛 봉건제와 절충하여 지방 세력들의 독립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군국제'를 실시했다. 또 진나라 때의 사상 탄압 대신, 여러 사상과 학파를 육성하고 각자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정책을 썼다. 동중서가 실시한 제도 중의 하나가 '과거제도(科擧制度)'이다. 과거제도는 비록 출신은 비천하지만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에게 권력과 영향력이 있는 지위를 보장해주는 봉건사회의 관리 등용 제도인 것이다. 이 과거제도는 명리학이 태동하기까지의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전까지는 출세를 하려면 천자의 눈에 들거나 무력을 사용해서 권력을 쟁취하거나 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서 이룰 수 있었지만 과거제도 실시 후 공부를 열심히 하면 누구나 출세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출세하고 싶고, 가문을 일으키고 싶으면 공부를 열심히 해서 과거시험에 합격을 하면 되고, 그리하여 권력도 쟁취하고 가문도 빛낼 수 있는 계기, 즉 개인의 세속적인 욕심이나 신분상의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제도적 계기가 마련되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내가 지금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는데 과연 언제쯤 과거시험에 할 수 있을까"하는 궁금증이 생기게 되고, 미래에 대한 의문과 길흉에 대한 것을 알고 싶어 했다.

진ㆍ한대에 이르러 무력충돌도 줄어들고, 정치적으로도 안정이 이루어지고, 과거제도라는 신분상승의 욕구를 해결할 수 있는 제도도 마련되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공부를 하게 되었다. 유학을 주로 장려하고 더불어 오행 학문도 발전하게 되었다. 따라서 한대에 이르러 이러한 공부에 대한 열정적이고 경쟁적인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똑똑하고 유능한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한나라 말기 동한 때 왕충이 탄생하게 된다. 왕충은 과거시험을 위하여 열심히 공부를 하였으나 끝내 합격을 하지 못하게 되자 "천명이라는 것이 있구나"하는 생각에 백과사전의 일종인 논형을 저술하게 된다.

<출처 : 픽사베이>

동중서(董仲舒)는 한나라 황제의 비대한 권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하늘과 땅, 하늘과 인간이 서로 감응한다는 '천인 감응설'을 주장했지만, 왕충은 "하늘과 땅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늘은 하늘이고 땅은 땅이다."라며 동중서를 비판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왕충에 의해 개인의 주체의식이 확립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 배경과 철학적 근원이 명리학의 태동과 관련 있음에 한나라 때까지의 역사적 흐름을 알아보았다. 어느 날 갑자기 명리학이 나타난 것이 아니고 이러한 사상적 토대가 이루어져서 인간의 운명적 주체 그것을 알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서 태동한 것이 명리학이다. 한나라의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술수에 관한 강력한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사마계주(司馬季主). 동방삭(東方朔), 엄군평(嚴君平) 등이다. 한나라 중반까지는 '사주(四柱)'라는 개념이 아직은 성립되지 않았다. 따라서 명리학을 말하기는 이르다.

한(漢) 나라가 망하고 위진 남북조의 혼란기에 접어들면서 세상은 어지럽게 되고 유능한 학자들은 세상의 권력을 버리고 초야에 묻히는 현상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름하여 '위진 선학(魏晉禪學)'이라고 해서 도교, 도장 사상이 연구되고 연단술, 내단 사상 등 도교에 흡수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선학은 인도로부터 중국에 전입된 이후, 중국 전통문화의 토양에 뿌리내리고, 발아하여 유ㆍ도 등의 중국 고유의 문화와 교융하여 화려한 사유(思惟)의 꽃을 피웠다. 도교의 교단은 성(性)과 명(命)이라는 두 범주를 제시하였다. 생리적 요소인 명을 기르는 공부를 전통적인 도교의 단학에서 취하고, 불교로부터 성의 공부를 수용하여 소위 '성명쌍수'라는 도교의 독특한 수양 공부를 제시하게 된다. 최종적으로 중국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출현하여 폭넓게 유행한 惠能(혜능)의 禪宗(선종)은 불교의 바탕에서 유ㆍ불ㆍ도 三敎合一(삼교합일)의 사상체계를 구성하였다.

참고문헌 : 한규진, 2017, 韓國傳統의 四柱 分析에 대한 硏究, 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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